어쩌면 우리가 직업을 갖는 이유는 "인정"의 획득일 수도 있겠다. 그 인정이라는 것은 좀 더 살펴보면, 반응인 것이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의해 존재를 확인 받는 것이다.
이건 두눈이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동물로서 인간의 한계이다. 대신 인간은 거울을 보지 않고 자신을 들여다 보는 "두눈이 안을 향하는" 이른바 성찰이라는 자신을 또 다른 타인의 시선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
여하튼 직업이라는 것은 재화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거기서 얻고자 하는것은 자신의 모습에 반응해주는 경험, 즉 "인정"에 대한 부분이 굉장히 크다. 자아실현이라던지 이런 말이 그 뜻이다. 상호작용을 통해서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고, 더 나아가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헌데 타인의 시선으로만 그 존재가 긍정되는 경험을 얻고자 할때 우리는 굉장히 불안해지는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데 그래서 타인의 시선으로 인정이라는 존재의 긍정에 대한 경험을 얻고 싶어하는데, 이게 타인은 그만큼 나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직업, 또는 회사, 조직과 개인 사이의 불안의 단초가 시작된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고자하는 그 안에서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욕구나 욕망이 채워지는 최초의 경험들 이래로 욕망을 채우는 방식 또는 형식을 각 개인들은 얻게 되고, 그 형식은 살아가며 강화되며 방향을 갖추게 된다. 그 형식은 분노가 될 수도, 우울이 될 수도, 또 배려나 친절이 될 수도 있다. 더욱 고도화가 된다면 예술이 될수도 또 프레젠테이션이 될 수도, 어떤 서비스나 물물의 교환 내지 교류를 하는 장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직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재화의 획득이 아니라, 이런 타인의 인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비추어 존재를 긍정되는 것을 확인받는 경험에 필요에서 이다.
과거에는 이런 것이 가능하였던 형식, 또는 방법이 직장에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살아가면서 가장 큰 화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신체적 한계로 인하여 타인의 시선으로만 우리를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확인을 받은 경험은 타인으로 부터 "인정"을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정을 획득하는 형식을 갖추게 되는데 그것이 "직업"이라는 형태이다.
직업이 갖는 근원적인 내적 목표가 "자신의 긍정"인데 그곳에서 계속 부정의 경험을 한다면 사람은 불행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욕망의 미스매치에 대한 결과가 우울이나, 분노 같은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페이스북도 그런 "반응"을 기다리는 곳이다. 좋아요를 통해서 긍정받는 것이다. 샌드버그가 싫어요를 만들지 않은 것은 정말 현명한 것 같다.
최초의 존재로서 타인의 반응에 대한 경험은 어머니와의 눈맞춤 일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를 긍정하는 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그 짧은 순간에 사랑을 느끼기도 어떤 정서적 만족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음...하여튼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이 긍정되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놓치는 부분은 타인들 또한 그러한 긍정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주 근원적인 이유로~
이건 두눈이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동물로서 인간의 한계이다. 대신 인간은 거울을 보지 않고 자신을 들여다 보는 "두눈이 안을 향하는" 이른바 성찰이라는 자신을 또 다른 타인의 시선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
여하튼 직업이라는 것은 재화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거기서 얻고자 하는것은 자신의 모습에 반응해주는 경험, 즉 "인정"에 대한 부분이 굉장히 크다. 자아실현이라던지 이런 말이 그 뜻이다. 상호작용을 통해서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고, 더 나아가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헌데 타인의 시선으로만 그 존재가 긍정되는 경험을 얻고자 할때 우리는 굉장히 불안해지는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데 그래서 타인의 시선으로 인정이라는 존재의 긍정에 대한 경험을 얻고 싶어하는데, 이게 타인은 그만큼 나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직업, 또는 회사, 조직과 개인 사이의 불안의 단초가 시작된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고자하는 그 안에서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욕구나 욕망이 채워지는 최초의 경험들 이래로 욕망을 채우는 방식 또는 형식을 각 개인들은 얻게 되고, 그 형식은 살아가며 강화되며 방향을 갖추게 된다. 그 형식은 분노가 될 수도, 우울이 될 수도, 또 배려나 친절이 될 수도 있다. 더욱 고도화가 된다면 예술이 될수도 또 프레젠테이션이 될 수도, 어떤 서비스나 물물의 교환 내지 교류를 하는 장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직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재화의 획득이 아니라, 이런 타인의 인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비추어 존재를 긍정되는 것을 확인받는 경험에 필요에서 이다.
과거에는 이런 것이 가능하였던 형식, 또는 방법이 직장에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살아가면서 가장 큰 화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신체적 한계로 인하여 타인의 시선으로만 우리를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확인을 받은 경험은 타인으로 부터 "인정"을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정을 획득하는 형식을 갖추게 되는데 그것이 "직업"이라는 형태이다.
직업이 갖는 근원적인 내적 목표가 "자신의 긍정"인데 그곳에서 계속 부정의 경험을 한다면 사람은 불행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욕망의 미스매치에 대한 결과가 우울이나, 분노 같은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페이스북도 그런 "반응"을 기다리는 곳이다. 좋아요를 통해서 긍정받는 것이다. 샌드버그가 싫어요를 만들지 않은 것은 정말 현명한 것 같다.
최초의 존재로서 타인의 반응에 대한 경험은 어머니와의 눈맞춤 일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를 긍정하는 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그 짧은 순간에 사랑을 느끼기도 어떤 정서적 만족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음...하여튼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이 긍정되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놓치는 부분은 타인들 또한 그러한 긍정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주 근원적인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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