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웃’,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1 교실에서 적응하기
우리나라 남자라면 군대에 대한 경험은 깊은 트라우마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제 예비군 훈련을 모두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다시 군대에 가있는 악몽을 꾸곤 한다. 그런 날이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왠지 모를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반면에 공통으로 화제 삼을 수 있는 기억도 된다. 정말 신기한 것은 우리나라의 부대의 숫자는 60만 명의 군인의 숫자에 비례하여 많을 텐데 최전방의 GOP부대의 경험이나 섬에서 근무했던 경험이나 모두가 공통으로 느끼게 되는 경험의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군대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필자가 군 입대를 한지 한달 정도 되었을 때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입대할 때는 지옥의 문턱을 넘는 듯한 기분으로 눈물로 훈련소를 들어갔었으나 막상 군생활을 시작하니 할 만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생활이 이상하게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뭔가 유사한 경험을 계속적으로 해오고 있었던 듯 한 느낌?
그렇다.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군대에 입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와 군대가 어떻게 비슷하냐고?
교실은 사실 글자 그대로 가르치는 곳이라기 보다는 적응하여야 하는 곳에 가깝다. 매년 새 학년이 되면 헤어짐에 적응하여야 했고, 선생님은 30등보다는 1등에서 5등까지를 잘 기억한다는 사실을 적응하여야 했다. 또 또래친구들 사이에서는 싸움을 잘하여야 생활하는 것이 편해진다는 것을 적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학교생활을 잘하려면 적당히 따라가주고 조용히 교실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것 이였다. 그런데 정작 왜 교실에서 그런 것들에 적응하여야 했는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었다. 학교라는 곳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갖지 않는 곳이였다. 그래도 군대보다 자유로웠다고? 과연 그랬을까?
얼마 전에 ‘핀란드 교실혁명’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을 보았다. 그 중에 철학을 전공한 한 교수가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 사회는 어차피 경쟁사회이고 현실은 냉혹한데, 학교에서부터 경쟁하는 방법을 배워야지 사회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 이였다. 그렇다. 세상의 논리는 경쟁이였던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의 바둑이나 철수, 영희의 우정 따위는 그 후로 별 필요 없던 것이다. 무서운 세상의 논리 속에서 지는 사람보다 이기는 사람이 되길 바랬던 깊은 교육적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교실이라는 곳은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따위 보다는 적응과 부적응 만을 알려줬었다. 교실이라는 곳은 냉혹한 사회를 나가기 전에 사회를 가르쳐주는 전초전이였고. 우리는 교실에서 경쟁하는 방법을 배우고. 이기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는 것에 익숙해 지던가. 둘 중 하나 인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경쟁이 무엇인가?
#2 정말 경쟁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기
며칠 전에 일본작가의 만화인 ‘원아웃’을 읽었다. 보통의 야구만화와는 다르게 원아웃은 꿈, 희망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승부에 대해서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한다.
생물학에서는 경쟁을 “한 군집 내에 같이 살고 있는 다른 종(種) 또는 같은 종 사이에서 자원이 부족할 때, 개체들이 자원을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우리가 획득하려고 하는 것보다 획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승부라는 것은 바로 경쟁의 상태에서 이기고 지는 것을 말한다. 스포츠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쟁 속에서 승부를 극단 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원아웃’에서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사실 그 승부가 이루어지는 판에서 진짜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가를 이야기 한다. 사실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고 단 한순간의 방심으로도 승리와는 멀어진다.
그런데 내가 12년이나 시간을 보냈던 교실이라는 곳이 정말 그러한 승부를 가르쳐 주었나?
나의 경우를 이야기하자면 난 교실에서 승부를 배우지 못했다. 오히려, 빨리 포기하는 방법을 배웠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경쟁인지 모른 채 끝없는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패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승자가 되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서 승리하여야 하는지, 어떤 것이 정말 승리인지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무엇이 진짜 승리일까? 아니 어떨 때 우리는 정말 이겼다고 느낄 수 있을까?
“승리했다”라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들어있다. 승부에서 끝까지 이기고 마지막 까지 남았을때 승리했다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러한 경우 승리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을 정의하기는 대략난감하다. 왜냐하면 인생은 스포츠와 달리 끝이 어디인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시기와 공간을 좁혔을 때 "승리했다"라는 행위가 정의될 수 있다. 음-
그렇다면 치열한 전장이라고 부르는 시장에서 경쟁의 전초전인 교실에서 승리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교실에서의 승리는 자신이 가진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라고 이야기 했다던데 그냥 한 말은 아닐거다. 결국에 치열한 전장에 나가기전에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고 나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종목이 무엇인지 알지못한다면 모두가 패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우리의 교실에서는 사실상 승자도 패자도 모두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리라는 것은 원론적으로 누군가를 이기는 행위이지만 결국에는 자기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승리이다.
자신이 가진 한계,
사회가 설정해 놓은 한계를 넘어 설 때 진정 승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김연아를, 박지성을 Winner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승리가 우리 자신에게 유의미해 지기 위해선 우리가 싸울 종목을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실이라는 곳은 치사하게도 한가지 종목만으로 세상의 경쟁을 가르쳐 준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도 ‘지는 사람’도, ‘열외된 사람’도 자신에게 의미있는 경쟁이 아니였음을 깨달았을 때 ‘속고 있었구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긴다’는 것은 남이 정해준 것을 이기는 것이 아닌 개인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할 때 진정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12년이라는 시간을 ‘개인성’을 죽이고 불공평한 룰을 가지고 살아야 바보 같은 패러다임으로 살다가 막상 개인들이 경쟁의 세계에 발을 디뎠을 때 진짜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모른 채 ‘패배자’로 헤매 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말 승부의 세계인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정말 승부인가? 승부는 무엇을 위한 승부인가? 세상 속에서 경쟁은 무엇을 위한 경쟁인가? ‘내’가 생각하는 이기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나는 누굴 이겨야 하는 것일까? 아니, 이기고 지는 것 그것이 내가 꼭 포함되어야 하는 걸까? 삶이 꼭 그렇게 밖에 정의되지 않는 것인가?
#3 나 자신으로 살아남기
난 그저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내 내면의 문제가 외부의 문제보다 더 크게 느꼈던 사람이라서 내 마음이 안정된 다음에는 별다르게 불만도 없던 사람이다. 그런데 요새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있다. 내 내면의 문제라고 느꼈던 것들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 혼자 만이 것이다. 이거 사실 내 문제가 아니였던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똑 같은 문제를 한 명이 이상이 겪고 있다면 이것은 뭔가 이상한 것이다.
꽤 오래 전부터 교실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사실 최근 고대나 서울대에서 커다란 대자보를 붙이고 학교를 떠나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이 교실을 떠난 다고 해서 무엇이 크게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이 세상의 룰에서 벗어난 사람일 뿐이니까. 그리고 열외를 선택한 사람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아 잠깐,
그런데 꼭 우리가 교실을 떠나야 하는 것일까? 아니, 왜 우리와 우리 부모님이 돈을 퍼부어놓은 학교라는 곳에서 왜 우리 마음 데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 아니 왜 우리는 우리 돈을 어마어마하게 내놓고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이 이상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거 학교 리콜운동을 벌여야 하는거 아닌가?
나 자신으로 살아남기. 이 명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이상하다.
이제 교육은 소비되는 시대이다. 그리고 교실이라는 장소도 소비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장에 논리에 맞추어서 왜 우리는 우리의 교실을, 교육을 리콜 받지 못하는 것일까?
나의 12년을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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