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을 적게 되면 그리고 그 글이 나와 관련된 누군가가 보면 조금은 불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경을 안쓰면 돼지. 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안된다. 그래서 글을 고치고 나면 처음에 글이 가졌던 느낌에서 문맥상 많이 달라진다. 내친구의 말처럼 난 섬세한 것 같다.
#2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생각이 많다기 보다는 생각되어지는 게 많다. 그냥 편하게 자의식의 과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 자의식을 어느정도 컨트롤 할 수 있기에,(그런데 자의식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단어에 나의 인식이 갇혀버리는 것 같다.) 지금은 그것이 많이 불편하지 않다. 그냥 신경쓰기 싫은 생각은 흘려보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럴까?)
이런 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예전에 봤던 골든보이라는 조금은 야해서 봤던 일본만화이다. (요새도 이 만화가 파는지는 모르겠다. 만화책방 가면 있지 않을까 싶다.) 일본 만화였는데 주인공이 막 생각이 커지는 장면에서는 말풍선이 엄청많다.
그런데 내가 어떤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렇게 되는 거니까. 내가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타인도 그렇게 나를 보게 된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지하철을 탈때 오며가며 만나는 사람들은 실제하는 사람들인가?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며 나와 손을 잡을 일도 없고 대화할 일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유령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끝도 없어지지만 어찌됐건 살아간다는 것은 (나또한 타인에게 유령일 수도 있겠지만) 내 자신에게 내 자신의 존재를 규명해 나가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지 않다. 다만 경험을 통해서 조금 익숙해 진것들이 많아졌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많이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정말 잘 알고는 있을까?
그렇게 때문에 살아가면서 정말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 '나'의 존재에 대해서 나의 취향에 대해서 나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하는가가 아닐까 싶다.(사랑 말고 다른 단어를 쓰고 싶은데 적당한 단어가 안 떠오른다.)
(사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글을 적으려고 했던것이 아니였으므로 글이 조금 산만하다.
블로깅을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고-흠.)
#3
사회복지를 아예 생각을 안하려고 했는데
알바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렇고 사회복지에 대해서 아예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문화복지를 하고 싶다고 자기소개서 마다 떠들고 다녔던것도 있구.
한국에서 문화복지를 한다면 내가 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학문적으로든 그게 서비스가 되었던 가에. 뭔가 사명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복지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희생정신 맘에 안든다. 젠장- 봉사정신도 엿먹으라고 그래라 사명감 따위로 일한 적은 없었다. 즐거웠다. 그뿐이다.)
헌데 문화복지라는 말 맘에 안든다.
문화적인 복지면 모르겠지만
복지적인 문화나.
사실 '복지'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 뜻은 굉장히 좋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복지국가나 사회복지정책 등의 의미로 쓰여질 때는 일방적인 수혜적인 의미가 많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일방적인 복지는, 일방적인 시혜는, 일방적인 소통은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나와 다른 누군가라고 바라보는 순간에
그건 그냥 자기만족이나 일이 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원봉사를 하거나 복지서비스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었을때
부담을 갖게 되거나 어려워 지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우리가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사회복지에 관련되서 나불나불 떠들고 싶지 않다. 그 일이 단순히 일로써만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많으시기에 내가 복지에 대해서 떠드는 것이 조금 창피하기도 하다. 그래도-)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때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분들에게 그 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 그렇구나.
복지도 선택되어지게 다양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우처 서비스는 장점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다시 문화복지로 돌아와서,
내가 문화복지라고 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우리의 사회복지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뜻이고 학문이기는 하지만 정책안에 들어 가서 이것이 시행될 때는 규모와 양적인 것에 치중되게 되고 '사람'이 실종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문화복지도 복지라는 속성안에 들어오게 되면 규모와 양적인 것에만 치중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다.
헌데 문화복지라는 것이 시행되었을때 과연
이것이 얼마나 선택가능한 복지가 될 것이냐라는 것이다. 선택가능하여져도 문화가 복지라는 이름을 붙였을때 자연스러운 것이냐는 거다. 복지서비스는 매체일 뿐이다. '경험'에 대한 중요성.
경험을 통해서 소통을 회복하고, 자신의 삶의 주도성을 찾는것.
자신의 삶의 존엄성을 깨닫는것.
이런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보다 먼저 고민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봐야 겠다.
글을 적게 되면 그리고 그 글이 나와 관련된 누군가가 보면 조금은 불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경을 안쓰면 돼지. 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안된다. 그래서 글을 고치고 나면 처음에 글이 가졌던 느낌에서 문맥상 많이 달라진다. 내친구의 말처럼 난 섬세한 것 같다.
#2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생각이 많다기 보다는 생각되어지는 게 많다. 그냥 편하게 자의식의 과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 자의식을 어느정도 컨트롤 할 수 있기에,(그런데 자의식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단어에 나의 인식이 갇혀버리는 것 같다.) 지금은 그것이 많이 불편하지 않다. 그냥 신경쓰기 싫은 생각은 흘려보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럴까?)
이런 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예전에 봤던 골든보이라는 조금은 야해서 봤던 일본만화이다. (요새도 이 만화가 파는지는 모르겠다. 만화책방 가면 있지 않을까 싶다.) 일본 만화였는데 주인공이 막 생각이 커지는 장면에서는 말풍선이 엄청많다.
그런데 내가 어떤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렇게 되는 거니까. 내가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타인도 그렇게 나를 보게 된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지하철을 탈때 오며가며 만나는 사람들은 실제하는 사람들인가?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며 나와 손을 잡을 일도 없고 대화할 일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유령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끝도 없어지지만 어찌됐건 살아간다는 것은 (나또한 타인에게 유령일 수도 있겠지만) 내 자신에게 내 자신의 존재를 규명해 나가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지 않다. 다만 경험을 통해서 조금 익숙해 진것들이 많아졌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많이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정말 잘 알고는 있을까?
그렇게 때문에 살아가면서 정말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 '나'의 존재에 대해서 나의 취향에 대해서 나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하는가가 아닐까 싶다.(사랑 말고 다른 단어를 쓰고 싶은데 적당한 단어가 안 떠오른다.)
(사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글을 적으려고 했던것이 아니였으므로 글이 조금 산만하다.
블로깅을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고-흠.)
#3
사회복지를 아예 생각을 안하려고 했는데
알바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렇고 사회복지에 대해서 아예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문화복지를 하고 싶다고 자기소개서 마다 떠들고 다녔던것도 있구.
한국에서 문화복지를 한다면 내가 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학문적으로든 그게 서비스가 되었던 가에. 뭔가 사명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복지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희생정신 맘에 안든다. 젠장- 봉사정신도 엿먹으라고 그래라 사명감 따위로 일한 적은 없었다. 즐거웠다. 그뿐이다.)
헌데 문화복지라는 말 맘에 안든다.
문화적인 복지면 모르겠지만
복지적인 문화나.
사실 '복지'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 뜻은 굉장히 좋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복지국가나 사회복지정책 등의 의미로 쓰여질 때는 일방적인 수혜적인 의미가 많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일방적인 복지는, 일방적인 시혜는, 일방적인 소통은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나와 다른 누군가라고 바라보는 순간에
그건 그냥 자기만족이나 일이 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원봉사를 하거나 복지서비스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었을때
부담을 갖게 되거나 어려워 지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우리가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사회복지에 관련되서 나불나불 떠들고 싶지 않다. 그 일이 단순히 일로써만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많으시기에 내가 복지에 대해서 떠드는 것이 조금 창피하기도 하다. 그래도-)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때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분들에게 그 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 그렇구나.
복지도 선택되어지게 다양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우처 서비스는 장점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다시 문화복지로 돌아와서,
내가 문화복지라고 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우리의 사회복지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뜻이고 학문이기는 하지만 정책안에 들어 가서 이것이 시행될 때는 규모와 양적인 것에 치중되게 되고 '사람'이 실종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문화복지도 복지라는 속성안에 들어오게 되면 규모와 양적인 것에만 치중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다.
헌데 문화복지라는 것이 시행되었을때 과연
이것이 얼마나 선택가능한 복지가 될 것이냐라는 것이다. 선택가능하여져도 문화가 복지라는 이름을 붙였을때 자연스러운 것이냐는 거다. 복지서비스는 매체일 뿐이다. '경험'에 대한 중요성.
경험을 통해서 소통을 회복하고, 자신의 삶의 주도성을 찾는것.
자신의 삶의 존엄성을 깨닫는것.
이런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보다 먼저 고민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봐야 겠다.
반응형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인적이고 피상적인 ‘교실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 (3) | 2010.04.01 |
---|---|
열두 줄의 20세기 디자인사, 김민수의 문화디자인을 읽고(디자인이 갖는 의미) (0) | 2010.03.27 |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0) | 2010.03.17 |
관계중심적 사고, 소셜미디어 (2) | 2010.03.13 |
[DIY] 내 노래만들기 ABC (3) | 2010.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