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바 람 탄 2010. 3. 17. 03:10

  샐린저는 허튼소리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책을 따라서 홀든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또 그를 통해서 내가 감춰두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야겠지만. 결국 내 얘기를 하게 될 것 같다.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책을 얼마 전에 읽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아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과연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떠한 나라, 아니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원하고 있는 모습인가? 어른이 된다면 당연하게 감수해야 하는 것들인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제목을 처음 알게된 것은 존레논을 저격한 마크 데이빗 체프먼이 들고 있던 책이였다는 것이다. 체프먼은 존레논을 저격한 후 태연하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이야기는 홀든 이라는 16살이 된, 그리고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한 소년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리고 소년이 가지고 있던 현실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과 맞닿아 조금은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올라가면서부터 새 학기가 될 때마다 심리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렸었다. 심리적인 불안감이라는 표현보다는 날 인정하지 않는 내면의 생각들이 가득했다. 친구들과의 편안한 관계가 되기 전까지 난 커져가는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들을 안고 있어야 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 그것을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그런 현상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단어를 사회복지학을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낮은 자아존중감

 

   나 스스로가 나에 대해서 존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을 온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 타인에게 비난 받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내가 어떤 이유가 아니고, 그냥 지금 나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나에게 해주었다면 어쩌면 그렇게 힘든 시간이 짧아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난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TV 뉴스를 봤다. 최근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신학기가 될 때 그런 심리적인 어려움을 보이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이다. 무엇이 나를, 아니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닌 나와 같은문제가 있던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폭력성에 대한 경험은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것 같은 상처로 오롯하게 남는다. 그리고 사회는 그 상처를 전수한다. 우리 사회는 전쟁이라는 큰 상처를 지닌 채 미처 우리 정신에 남은 그 상처를 돌볼 새가 없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재건되어 세계 속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는 숨가쁜 질주를 멈추지 못하고 상처들이 곪든 터지든 알 바가 아니였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나에게 전해준 상처들이 인간이 견딜 수 없을 폭력을 경험한 바로 그 세대의 상처였기 때문이다.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한다.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을 때, 혹여 낭떠러지 근처로 아이들을 잡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홀든은 자신의 동생 피비가 자신처럼 학교를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자신 또한 누군가 잡아주길 바라고 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50년도 더 된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이 주는 교훈은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직까지 유효하다. 아니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 지금은 호밀밭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은 애초에 없다. 호밀밭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아야 할 아이의 시절은 이제 사라졌다. 작은 사각형의 교실에서 경쟁과 등수로 매겨진 현실에서 아이의 시간을 강탈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교실은 끝도 없이 확장되서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인원들과 경쟁하여야 하는 구조 속에 몸을 맡겨야 된다. 도대체 우리의 호밀밭은 누가 파괴했을까?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다. 아니 어른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도 모두 편하게 이야기 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 나도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도 되고 싶은지 모르겠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내가 그런 파수꾼 역할을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했던 경험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친구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 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뒤를 사냥꾼처럼 좇아오는, 순응하며 말잘 들었던 착한 아이였던 나에게, 도대체 왜 미칠 것 같은 잘 짜여진 메트릭스가 학교를 졸업하고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인지 사회라는 물을 먹고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몸으로 지쳐가며 알게 되었다.

회사를 나올 때 해주었던 상사의 말이 아직도 날 괴롭힌다. 장장 두 시간 동안에 걸쳐서 자신의 얘기를 했고, 난 전혀 동조해줄 마음은 없었지만 설득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거지 같은 세상의 무서움을 이야기 해주려는 것인지 이 자그마한 곳을 나가는데도 나에게 이런 정신적 소모가 있어야 함이 힘이 들었다. 착한 아이처럼 자리에 앉아서 “네, ….”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맑은 눈빛으로 그의 말을 동의하였던 시간들 때문에 머릿속에서 말도 안되는 그의 말을 없애기 위해 무려 주말 내내 공원을 걸어 다니며 내 자신과 싸워야 했다.

그도 물론 나를 걱정해줘서 하는 말 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젊은 날을 투영하고 이해는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온, 아니 동참한 메트릭스의 오점을 수긍하기는 굉장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그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다. 직원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거다. 아니, 도대체 왜 그가 직원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좋은 의미에서 좀 더 자유롭고 소통하는 문화를 원했던 건가?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착한 아이처럼 이렇게 말했다.

문화란 말로써 이루어 지는 것 같아요. 평소때 우리가 말을 잘 해야겠지요.”

 그는 평소에 사람들의 자존심을 댕강 잘라내는 말을 잘한다. 그걸 이야기한거다. 그런데 멍청하게도, 사람들을 많이 지지해주라는 거지?’라고 대답한다. 알면서도 그렇게 얘기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구조 속에서 분업화된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고 역할놀이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자신의 생각 따위는 죽여 버린 채 부속품으로써 아니 하나의 역할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충실하게 하느냐가 이세상에서 성공 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일 것이다. 당신이 그역할을 하는 것뿐 이라는 것을 슬프게도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역할’을 사는 대신 자신의 자아를 팔고, 얻어지는 것이 세상의 식료품을 살 수 있는 돈이라는 것임에 예민한 우리는 괴로워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역할에 자신이 녹아 들어 자신이역할인지역할이 자신인지 모를 때쯤에 커다란 연극무대에서 이제 객석으로 내려가라는 이야기를 들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배역이 같은 것이 그 사이에 완충되는 세계(이를 테면, 가족, 취미, 여가, 놀이, 주로 여성들의 세계일 것이다)를 구축해 놓았겠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진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도대체 이 불안은 누가 조장하는 것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고등학교 사회시간에도 배웠었지만 산업화 이후 우리는 거대한 공장의 부속품이 필요했고교육은 그 부속품을 생산해내는 역할을 충실이 해왔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세상의 연극에서 배역을 맡을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이제 다시 자유로운 개인으로 돌아가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사방에 붙어있다.

 

 디지털 노마드, 2.0, 창조적인 인간, 자유로운 개인

 

 하지만, 어디에 있던 시스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최근 자신의 삶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깨닫고 불안함과 싸워야 하는 광야에 개인이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질문을 잊고 살았었다. 이제 광야에 나온 사람들은 하나 둘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덮어놓았지만 중요한 그 질문을 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이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에게, 아니 당신이 이 빌어먹은 땅에서는 자녀를 갖고 싶지 않다면, 그래도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떠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가?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나에게 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십여 년 전의 교실로 들어가 많이 아파했던 내 어린 날들에게 묻는다. 넌 어떻게 살고 싶었니? 내가 어떤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니?

 

조금은 순진하고 조금은 멍청한 생각을 많이 했던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조금 꿈꿀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어. 내가 일주일 동안 울면서 엉뚱한 얘기를 묻더라도 놀라지 않고 미소 지어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어. 산다는 게 겁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만 그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거 얘기해줘.

 

  50년 전의 뉴욕의 홀든에게도, 지금의 TV 속의 살인자에게도 똑같은 어린 시절이 있을련지도 모르겠다. 많은 아이들에게 제발 그렇게 이야기 해줘라. 세상을 공포스러운 곳으로 만들지 말아달라.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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