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지하철

바 람 탄 2010. 3. 19. 01:40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가끔 공포스럽다.
이런 얘기 한적이 있던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발밑의 층계들이 마치 공장의 생산라인 벨트 같고, 끊임 없이 루프되는 에스컬레이터의 주의 사항에 대한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는 이대로 날 조각 조각 분해해 버릴 것 기분을 느끼게 만들지. 그리고 가장 공포스러운건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무심한 표정이야. 조각 조각 분해된 내 몸 조각이 그들의 발 밑에 흩어져도 그대로 목적지 까지 편안하게 올라갈 테니 말이야. 그 무심한 표정으로 말이야.

어디로 가십니까?
의정부방면은 이쪽. 인천방면은 이쪽.

표지판을 쳐다보고 나도 별스런 마음 없이 한쪽 방면을 정하지.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린다. 적당히 붐비는 지하철 플렛폼. 강처럼 흐르는 지하철 레일을 경계로 이쪽. 저쪽. 사람들이 서있네.
빠아앙-
경적소리를 내며 무서운 괴물처럼 반대편의 차선에 열차가 들어온다.
반대편의 사람들은 들어오는 열차를 바라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열차에 가려진다.
-
이윽고 멈췄던 열차가 다시 덜컹거리며 울어데고 열차가 지나간 자리엔 먹성 좋은 괴물이 사람들을 모두 삼켰음만 흔적으로 남았네.
이번엔 내가 서있는 자리로 열차가 들어온다.
촤르륵
문이 열리고
휩쓸려 올라탄다.

많지 않은 사람들 적당히 비어있는 자리
적당한 자리에 왠지 피곤한 마음에 적당한 자세로 엉덩이를 붙이지.
왜 마주보게 만들었을까? 이 좌석들 말이야. 내 앞에 사람들과 시선을 대하기는 영 불편 한게 아니야. 그래서 광고가 머리위로 붙어 있는 것일까? '여기 보세요'
아마도 최소한의 공간으로 최대한의 사람을 태워야하는 그러한 논리로 배치된 좌석일거야. 한정된 공간. 한정된 좌석. 넘치는 사람.
뭐. 별 다르게 고민할 것이 뭐 있어? 어차피 많이 실어 나르면 되는 것이지. 정책이란게 그런거지 뭐.

몇번이 문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몇번이 내 앞의 좌석에 앉은 사람은 바뀌었다. 매역마다 오르는 사람이 있었고, 매역마다 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든 저렇든 간에 열차는 제시간에 움직여야 하니까.
그 남자는 그때 올랐어. 갈아타는 곳.
사람들이 많이 올랐탔어.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나는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과 조금은 안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
그 남자. 내 아버지 뻘 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발 내딛은 후에 많은 꿈이 있었으나 이제는 '적당히 살아야 한다'는 세상의 진리를 신봉하게된 흔히 볼 수 있는 어깨가 처진 남자였다. 오늘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수한 의문은 이제 멈출 수 없는 생산라인의 벨트에 놓인 부품처럼 멈추지 않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잃은 상태였으리라. 아마도 그의 아내도 그의 이름을 잊은지 오래고, 그의 자녀들에게는 돈벌어 오는 기계로 전락했으리라. 슬프지만 할 수 없다 이게 현실이니. 이런 마음도 가진 적이 있으리라.
그는 내 앞에 멈춰섰다. 난 건너편 창으로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고 이어폰을 꼽고 있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기억 나지 않는다. 두 정거장 후 쯤에야 그가 내앞에 서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표정. 그의 두다리는 지쳐 있었을 것이다. 방금 전에도 업무처의 박사장을 만나고 왔었다. 남들 다있는 인생의 척도가 되는 차가 없는 그는 두다리로 뛰어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량해 보이는 이 학생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다. 그의 표정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젊은 것 들이란.'
이 학생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왠지 화가 난 마음이 들었다. 목적지는 멀었다. 아직 40분은 더 가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 지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앉아 있자.
하지만 몇정거장이 더 지나자 학생의 마음도 불편해진다. 더군다나 아직도 그 아저씨는 비켜서지 않고 여전히 그 표정- 세상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이였기 때문이였다. 다음 정거장이 되면 건너편 노선표를 보는 척하면 일어서자. 학생은 생각했다. 다음역 문이 열릴 때 쯤 학생은 노선표를 보기 위해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그 남자는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게 끝이 아니야.
난 건너편 문 앞에 섰지. 사실 이게 편해. 마주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 표정을 볼 필요도 없고 창 밖의 건조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니. 열차가 역을 지나 까만 터널을 지날 때 마다 난 거울처럼 그 자리에 앉은 그 남자를 바라 볼 수 있었어.

남자는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뭔가 수치스런운 짓을 한 듯 하였다. 그가 원하던 데로 두다리는 쉴 수 있었지만 이건 아니였다. 그 학생에게 맘을 들킨 듯 하였다. 사실 남자는 이 선량해 보이는 학생을 선택한 것이였다. 이런 선량한 얼굴의 학생은 자릴를 양보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것이였다. 하지만 이 학생은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저주를 하였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도대체 자신을 편하게 하질 않는다고. 도대체 자신은 남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었고 사람들이 가는 길을 크게 벗어 난 적도 없었는데 왜 이 빌어먹을 세상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빌어먹을 박사장 얼굴이 생각났다. 부모 잘만난 그는 남자가 돈이 없어 결혼 반지도 주지 못하고 고 혼인을 하였던 그 나이에. 거만하게 자신에게 댕강 짤라진 말로 이번 건도 댕강 짤라버리고 그의 마음의 무엇도 댕강 짤라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이번엔 이 선량해 보이는 학생도 배신을 한 것 이였다.
앉아있는 내내 불편하였다. 학생은 비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양보하였을 것이다. '그리 소원인 자리를 양보해 주겠네요.'
건너편 문 앞에서 등을 돌리고 서있는 그 학생은 내리지도 않는다. 이건 무언의 시위이다. 이렇게 남자는 생각하였다.

결국에 우리는 같은 곳에서 내렸다. 목적지에 다다렀을때- 그 남자가 자리에 앉은 지 30분 만에- 나는 남자의 표정을 살피었다. 남자는 짧게 헛기침을 하였다. 고개를 다시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그가 바라보는 듯 하였다.
문이 열린다.
촤르륵.
내가 먼저 발을 띠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따라 나왔다.

좋지 않은 기분이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 다음은 모른다. 어디로 갔는지. 그 남자나 나나. 어디를 향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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