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긴 겨울코트를 입고 있었다. 날은 제법 추워지기 시작하였던 11월로 기억한다. 오랫동안 서랍에 잠들어 있던 겨울냄새가 나는 코트를 입고서 나는 거리를 나섰다. 해는 막 마지막 빛을 땅위에 쪼이고 긴어둠에 몸을 숨기려 하였었다. 거리에 사람들은 저마다 몸의 열기를 뺏기지 않으려는 듯이 잔뜩 움크린 채로 혹은 둘이 붙어있는 채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때에도 나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속도로 흐르는 듯 하였다.
째깍.쨰깍.
손목시계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채 사람들의 시간의 흐름에 다가서려 하였다.
쨰깍.째깍.
시침은 재잘재잘 말을 걸듯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이름없는 새 한마리가 머리위로 푸드득 날아가버린다. 도시의 비둘기. 88올림픽 이후로 우리나라의 산비둘기는 사라져만 간다. 사마란치 위원장이 가지고온 유럽의 골치덩어리 비둘기들은 이제 우리의 강산에 도시에 하늘의 쥐처럼 놀라운 번식력으로 도시의 전기줄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람이 곁에 가도 이제 꿈쩍도 안하는 비둘기 무리를 빙 돌아서 피해가면서 귀에 이어폰을 꼿았다. 주머니 속의 시디플레이어에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락스피릿. 비둘기는 하늘의 쥐.
언니네 이발관의 약간은 하얗고 파란 음악을 귀로 스며들게 한다.
비둘기는 하늘의 쥐.
찰랑거리는 기타음색을 따라 하늘에서 차가운 눈송이 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코끝에 차가운 눈송이가 느껴진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공원에 들어섰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에 공원의 연인들은 들뜬듯 하였다.
앙상한 나뭇가지는 이네 하얗게 눈이 쌓일 것이다.
난 공원 호숫가의 적당한 벤치를 골라서 앉았다.
생일기분. 언니네 이발관은 여전히 귓가에 찰랑거리며 비음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늘은 나의 스무번째 생일인데 참 이상한건 멀쩡하던 기분이
왜 이런날만 되면 갑자기 우울해지는걸까
난 정말 이런날 이런 기분 정말 싫어
내 스무살의 생일은 벌써 지났다. 그리고 난 내 생일은 그렇게 우울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언니네 이발관이 이야기하는 생일기분이라는 것.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옆을 보니 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날 빤히 바라 보고 있었다. 무어라 이야기 하는 듯 하였다. 나는 한쪽 귀의 이어폰을 뺴었다.
"아저씨, 언니네이발관 알아요? 와~나도 언니네이발관 좋아하는데"
아마도 이어폰의 소리가 커서 다 들렸나 보다.
"있잖아요. 언니네이발관 좋아하는 사람 제 주변엔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지나가는데 이 노래 들렸어요. 그래서 너무 좋았거든요"
이 아이는 갑자기 내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난 무슨 대꾸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난 어제 친구의 추천으로 씨디를 빌렸기 때문에 오늘 처음 들었던 것 이였다.
"아저씨도 언니네이발관 좋아해요? 나 무지무지 좋아하거든요. 저 홍대에 공연도 보러가곤 해요. 아저씬 가본적 있어요?"
"어...그래."
"와. 정말 반갑다. 나는요. 정석원 오빠가 정말 좋아요. 너무 귀여운것 같아요. 목소리도 이쁘고. 아 기타치는 오빠도 멋있구요."
"응..."
"아저씨 저 근데 음악좀 같이 들어도 돼요? 이렇게 밖에서 눈오는데 노래 들으면 정말 좋을 것 같거든요. 예?"
"........"
"아, 같이 들어요."
아이는 내 이어폰 한쪽을 귀에 꼿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찰랑거리는 기타소리에 맞춰 내리는 하얀 눈송이를 함께 바라 보았다.
그때가 내 나이 스물하나, 럭키나이가 열일곱이였을 때일 것이다.
아이의 요구로 씨디를 세번이나 듣고 이제 마지막 노래가 이어폰으로 흘러나왔다. 우스운오후.
오 내 처음날이 내일은 없다고 하네 어느 이른 봄엔 꽃을 심어보지
만
오 난 내일을 위해 노래하진 않아
눈이 부시도록 푸르고 끝없는 길을 나도 그안에서 걷고 싶었던 거야
오 내마음을 전해 볼수가 없네..
아이는 만족한 얼굴로 날 바라보면서 이어폰을 귀에서 뻇다.
"와. 정말 노래좋죠? 흠..."
아이는 한참 하늘에 이제 드문드문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다.
"근데...너 이름은 뭐니?"
난 이제서야 그녀의 존재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엉뚱한 질문으로 답변을 하였다.
"아저씨, 아저씨 럭키페리오치약 쓰죠?"
"어?"
"아저씨 옆에서 음악듣는데 럭키치약 향기 났어요. 나 럭키치약 젤 좋아하거든요. 민트향, 그게 제가 젤 좋아하는 맛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서 자리를 일어났다.
"아저씨 담에도 또 만날수 있으면 좋겠다. 흠. 언니네이발관 좋아하는 사람이 제 주변엔 별로 없어서요. 아저씨 담에도 공원에 올거죠?"
"어....그래..."
"그럼 담에 만나면 음악 또 같이 들어요. 아저씨 안녕"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총총히 호수를 돌아 뛰어갔다.
난 벤치에 앉아서 다시 씨디를 플레이시켰다. 깜깜한 하늘에 하얀 눈송이는 이제 거의 그치려 하고 있다.
"럭키....럭키..."
난 결국 그녀의 이름을 알지못한채 그녀가 좋아한다던 럭키치약의 향기를 생각해 보려 노력을 하였다.
귓가에는 찰랑거리는 기타소리가 따스히 스며들었다.
2부 비둘기는 하늘의 쥐(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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